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쉴레이만 1세 (문단 편집) ==== 뛰어난 내치 ==== [[파일:attachment/쉴레이만 1세/Süleyman.jpg]] 쉴레이만 1세는 [[헝가리]] 점령, [[제1차 빈 공방전]], [[프레베자 해전]] 등을 통해 정복 군주로서의 인상이 강하지만 실제로는 내치에 있어서도 대단한 군주였다. 괜히 '''입법자'''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 아니다. 그는 후대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그러했듯이 법을 정비하는 것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군하총회, 이집트 법전, 쉴레이만 법전 등이 그의 손에서 짜여졌다. 특히 군하총회는 법률로서 오스만 제국 내부의 분란을 진정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게다가 그는 전통적인 이슬람 법인 [[샤리아]]가 미치지 못하는 규율까지도 '카눈'으로 정비시켰다.[* [[로마법 대전]]이 이전까지의 로마 법을 집대성한 것이었던 것처럼, 쉴레이만 혼자서 법전을 썼다기보다 이전까지의 오스만 법을 총정리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부황인 셀림 1세에 이르기까지의 역대 황제들이 반포한 칙령을 총정리한 다음 서로 모순되는 것은 적당히 간추렸으며, [[메흐메트 2세]]가 최초로 반포한 성문법도 영향을 주었을 듯 하다.] 사유재산도 보장했으며 [[노예]]라 하더라도 쓸만한 인재는 관료로 올렸다.[* 다만 노예도 관료로 등용한 것은 쉴레이만 시대의 특징이라기보다, 오스만 제국의 역대 정책을 그대로 따른 것.] 그는 예술과 건축에도 관심을 표명했다. 수많은 [[모스크]]가 그의 치세에 건립되었으며 회화와 공예, 문학 등 다방면의 예술이 발전했다. 예술인들은 술탄의 후원 하에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으며 국가 엘리트의 지위를 누렸다. 심지어 그 소문을 듣고 멀리 [[유럽]]에서까지 찾아올 정도였다. 쉴레이만 1세의 치세에서야 오스만의 문화는 비로소 [[페르시아]]의 영향을 벗어나 독자적인 틀을 갖출 수 있었다. 게다가 쉴레이만 본인도 문학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는 무히비(Muhibbi, '연인' 이라는 뜻이다)라는 필명을 쓰면서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으며, [[튀르크어족|튀르크어]]와 [[페르시아어]]를 모두 구사하며 많은 시를 지었다. 그리고 재임 내내, 심지어 원정 와중에도 틈틈이 [[일기]]를 써서 당시의 정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을 후대에 남겼다. 정말이지 정복황제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문화적 군주였던 것이다. 그의 치세 속에서 피어난 문화적 성취는 훗날 [[튤립 시대]]의 기초가 된다. 이런 뛰어난 내치 덕분에, 잦은 원정에도 불구하고 신민들은 그를 성군으로 추앙했다. 그리고 역사는 이 시기를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라고 평가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